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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 갑신정변

by (ꔷ̥̑.̮ꔷ̥̑)🥺ྀི( ͒_̓ ͒ )—̳͟͞ 2023. 2. 25.

미국에 보빙사로 파견된 그들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직접 목격하고 세계 박람회도 관람하였다. 미국을 다녀온 그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서양처럼 빨리 서구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개화파는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누었나

 청나라의 양무운동에 영향을 받은 김홍집, 김윤식, 민영익 등은 유교 질서 체제를 유지하고, 중화 질서의 울타리 안에서 양무운동을 본받고자 하던 이들을 온건개화파, 그러나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생각이 달랐다.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따라서 문명개화를 진행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전통적인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진개화파들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청나라의 도움으로 권력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과 양무운동을 개화의 본보기로 삼은 온건 개화파는 점점 더 청나라에 의존하였다. 이런 가운데 김옥균이 재정난 해소를 위해 일본에 차관을 도입하려다 실패하면서 급진개화파는 저치적으로 힘들어졌다. 이 시기 청나라는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충돌할 조짐이 보이자 서울 주둔 병력의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던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약속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 연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갑신정변이라 한다. 이들은 민씨 세력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급진개화파는 어떤 나라를 생각했는지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 후 새 정부 수립을 각국의 공사들에게 알리는 한편, 국가 체제의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먼저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폐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들의 평등을 보장하여 개인의 능력만으로도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왕권 중심의 정치를 개혁하고 내각제도를 수립하여 조세, 재정,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조선을 힘 있는 근대식 국가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민씨 세력의 반대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백성들도 급진개화파 세력을 일본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공격하고 일본의 공사관도 백성들의 공격을 받았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남아 있던 홍영식 등은 살해되었다.

정변 실패 후 급진개화파의 개혁안은 모두 폐지되었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전제 군주제를 개혁하여 문명화된 근대 국가를 만들려는 급진개화파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김옥규은 일본 망명 중에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청나라의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개혁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서광범은 미국 유학 후 귀족하여 갑오개혁 때 왕권으로부터 독립된 사법제도를 만들고자 하였고, 재판소 구성과 법관 양성을 위한 법령을 만들어 사법권을 보장하였다. 박영효 또한 2차 갑오개혁에서 청나라로부터 독립과 내각제 도입 등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렇듯 급진개화파는 근대적 가치를 점점 실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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