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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에도시대와 막부체계 및 조닌문화

by (ꔷ̥̑.̮ꔷ̥̑)🥺ྀི( ͒_̓ ͒ )—̳͟͞ 2023. 2. 3.

일본 역사에서 에도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 지역에 본거지를 만들고 막부가 집권한 시대이며, 서민적이고 도시적인 문화가 유행한 조닌문화 널리 퍼졌다.

 

에도시대와 막번체계

일본 15세기 후반에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분쟁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면서 일본은 약 100년 동안 전국시대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분쟁 중 오다 노부나가 뒤를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 침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죽은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현 도쿄)에 막부를 열어, 에도시대가 시작되었다. 쇼군은 중앙과 직할지를 지배하였고, 지방의 다이묘들은 번이라고 불리는 영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막부와 번으로 구성된 이 시기를 일본의 지배체제를 막번체제라 한다. 막부는 엄격한 법규와 산킨코타이 제도를 통해 다이묘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한편 일본의 천황은 정치에서 배제하였다. 에도막부는 초기에 교역의 공신력을 높이고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상인들에게 무역 허가증을 발급하여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통치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크리스트교를 금지하고 사무역을 통제하는 등 쇄국정책을 채택하였다.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인에게는 나가사키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그들을 통해 배운 서양의 의학, 천문학, 조선술과 같은 학문을 난학이라고 한다.

 

에도시대의 다이묘 통제

다이묘가 막부로부터 지배권을 부여받은 영지와 그 지배 기구를 번이라고 한다. 에도시대에 일본전역에 약270개의 크고 작은 다이묘가 있었으며, 전쟁 등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영지 크기에 따라 정해진 병사와 군마를 준비하여 쇼군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고, 평시에는 에도성 수리나 하천 공사등에 동원되는 의무가 있었다. 에도막부는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다이묘가 거주하는 성을 제외한 모든 성을 파괴하도록 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무가제법도"라는 법령을 공포하여 다이묘가 성을 새로 만들면 안 되고, 성을 수리하거나 다이묘끼리 혼인 관계를 맺을 때는 사전에 막부에 허락을 받도록 하였다.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 통제방법은 산킨코다이 제도였다. 이 제도에 따라 다이묘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영지와 에도에서 생활해야 했고, 그 가족은 에도에 인질로 머물러야 했다. 막부가 강한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막번 체계는 중앙 집권적 봉건체제라 할 수 있다. 

 

상공업의 발전과 조닌 문화

에도시대에는 개간사업으로 경지가 확대되고, 농기구와 시비법 등이 개량되어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고 각지에서 상품 작물이 재배되었다. 또한 막번체제의 정비와 함께 전국의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상공업이 발전하였다. 그에 따라 각지에 도시 또한 발전과 상공업자들은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경제력을 갖춘 대도시와 조닌(상인/수공업자)은 특유의 조닌문화를 발전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에도 막부는 상하의 신분 질서와 예절을 숭상하는 성리학을 체제유지를 위한 관학으로 중시하여 양명학이 성행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고전과 고대사 연구를 통해 유교, 불교 등 외래사상에 물들지 않은 고대 일본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국학 운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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