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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발전 사회와 문화

by (ꔷ̥̑.̮ꔷ̥̑)🥺ྀི( ͒_̓ ͒ )—̳͟͞ 2023. 2. 5.

13세기말 수많은 튀르크 계통의 세력이 여러 소국을 세워 겨루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민족이 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14세기 후반에 헝가리가 이끄는 크리스트교 연합군을 격파하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고 술탄의 징호를 사용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발전

오스만제국은 티무르 왕조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지만, 곧 체제를 정비하여 메메트 2세 때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로도 불렸다. 그 후 셀림 1세 때에는 이집트의 맘루트 왕조를 정복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때 맘루트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을 장악함으로 오스만 제국이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술래이만 1세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헝가리를 정복하고 빈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유럽의 연합 함대를 격파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7세기말 2차 빈 포위가 실패하고 헝가리를 상실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사회와 문화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와 발칸반도 북부 등 새로 획득한 영토의 통치를 총독이나 현지 지배자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은 술탄이 관료와 군대를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를 통해 직접 지배하였다. 술탄의 직할지에서는 토지 조사가 이루어졌고, 촌락에 거주하는 기병에게 토지에 대한 징세권인 티마르 제도가 시행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제국 내부의 이교도들에게 이슬람을 강제하지 않았다. 인두세만 내면 인상을 인정하여 지역마다 종교별, 언어별 공동체를 만들어 자치를 누리도록 하여 오스만 제국에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오스만 문화는 비잔티움 문화를 계승하면서 튀르크 문화를 발전시켜 동서 문화를 융합하였다. 건축에서는 비잔티움 양식을 도입한 모스크가 건축되었고, 문학과 미술에서도 페르시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실용적인 학문도 발달하여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오스만제국의 데브시르메 제도와 예니체리

오스만 튀르크어로 소집이란 뜻의 데브시르메는 오스만 제국이 주로 8~10세의 크리스트교 청소년들을 징집하는 제도가 운영되었다. 징집된 청소년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교육과 훈련을 걸쳐 술탄의 노예로 충원되었다. 이들 중 일부 우수한 성적 내는 청소년은 궁정에 들어가 고급 관료로 출세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술탄의 직속 상비군인 예니체리 군단에 편성되었다. 예리체리는 "신군"이란 뜻으로 술래이만 1세 무렵에는 무려 12,000~13,000명 정도에 달하였다. 총으로 무장한 예니체리 보병과 포병대는 오스만 제국 군대의 주력으로 정복전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술탄직 계승에 간섭하고 이스탄불에서 분쟁을 일으켜 자신들이 요구를 관철하는 등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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